박기수(Park Gi-Soo)

서울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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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말

길을 걷습니다.
아름다운 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남들이 걸어가지 아니한 길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오랜 가슴앓이로 그리워만 했던 그 분이 포근한 눈빛으로
내가 걸어가는 그 길을 바라보고 있을테니까요.

바람의 숨결속에 묻어 내게로 오라하십니다.
때론 천둥 벼락으로 이정표를 만들어 길을 안내하십니다.
오늘은 향긋한 라일락향으로 내 코끝을 간질이며 이리로 저리로 오라십니다.

저는 그냥 걷지요.
천천히도 느긋이도 아닌 그냥 건너 마을 마실 가듯 그리 걷지요.
잰걸음으로 오라 재촉 하신 적은 없으니까요.

길을 걷습니다.
꽃잎을 모두 바람결에 날려버린 벚나무들이 파릇한 숨결로 속삭이듯이 말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구요.
나는 대답합니다. 아! 그 전에 인사부터 해야겠지요.

“나는 그림 그리는 박기수야. 어디서 온지는 나도 몰라. 어느 날 문득 나를 보니 이 길을 걷고 있었어. 나는 이 길을 걷는 것이 너무 좋아. 이슬 머금은 풀 향기, 바람에 날리는 꽃잎, 바람의 거친 숨소리를 들려주는 버드나무 숲 또는 바스락거리는 낙옆들의 재잘거림이나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들. 그 속을 걷고있는 나..... 어디로 가냐고? 이 길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거야. 세상 모든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다고 하던데... 이 길의 끝은 바다는 아닐꺼야.”

길을 걷습니다.
숨찬 오르막 뒤엔 숨 고르는 내리막 길이 있습니다.
타는 갈증으로 마른 침을 넘기기 힘들 때 쯤이면 나타나는 작은 옹달샘도 있지요.
그 분은 늘 내가 필요한 것들을 그 길 위에 조용히 마련해두시곤 하지요.
내가 그 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멈춤없이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을 오늘도 걷습니다.

60여년 동안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길동무가 되어주었던 고마운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늘 제 곁에 작은 촛불로 어둔 길을 밝혀주었던 아내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길을 걷습니다.
이제는 그 동무들의 머리에도 하얀 서리꽃이 피었습니다.
그래도 그 길을 걷습니다.
깊은 산속의 그 적막감이나 매서웠던 삭풍들도 이제는 정겹기만 합니다.
그 길에서 만났던 많은 인연들은 이제 추억의 캔버스 속으로 잦아들었습니다.
산이 되고 바위가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됩니다.

-2010년 5월 산 그림 전문작가 박기수(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