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웅(Goo Bon-Eung)

1906년03월07일 서울 출생 - 1953년02월02일

서울에서 활동

학력

1934년 태평양미술학교 미술 전공
니혼대학교 미술 전공 학사
가와바타미술학교 미술 전공
경신고등학교 졸업

경력

1952년 서울신문
1952년 독립미술가협회 설립
1946년 문교부 편수국 미술과목 편수사
1945년 조선미술건설본부

수상경력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 특선

단체전

2023 다시 보다 : 한국근현대미술전, 소마미술관, 서울
2017 신여성 도착하다 The Arrival of New Women,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2017 <균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추가정보

서양화가로, 호는 서산(西山)이라 한다. 고려미술원에서 이종우(李鍾愚)에게서 사사하고 도일하여 일본대 전문부 미술과를 졸업(1926), 다시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나왔다(1934). 귀국 후 목일회(牧日會), 백만회(白蠻會) 등의 창립에 가담하는 한편 문예지 『청색(靑色)』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문교부에서 미술교과서를 편찬하며 미술교육과 비평활동에 계몽적 활동을 하였다. 화풍은 입체주의 영향으로 지적, 분석적 경향을 보였다. 대표작은 『정물』, 『우인상(友人像)』 등이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2살 때쯤 가정부의 부주의로 마루에서 떨어져 척추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불구가 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하였고 당시 교장이었던 쿤스(Koons, E. W.)가 그의 화가로서의 재질을 인정해 준 것이 미술가로서의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미술 수업은 1923년경 서양의 새로운 회화 방법을 가르치던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동경에서 갓 돌아온 서양화가 이종우(李鍾禹)와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서구식 조형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무렵 같이 목탄 데생을 배운 화가로는 이마동(李馬銅)이 있었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조각에의 관심과 열의는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 습작」이라는 조각 작품을 출품, 당당히 특선을 하기에 이르렀다. 1928년 더욱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畫學校)에 들어가 1년간 석고 데생으로 기초를 다졌다. 1929년에는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미학과에 적을 두었으며, 다음 해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미술 이론을 수학하였다. 그의 다채로운 수학 편력은 미술가로서 폭 넓은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그는 다이헤이요미술학교 시절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다이헤이요미술콩쿠르에서의 두 번에 걸친 수상과, 당시 새로운 경향의 진취적 미술 운동에 앞장섰던 이과전(二科展)·독립전(獨立展) 등에 출품, 입선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1933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 본과를 졸업, 귀국함으로써 서울에서의 화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1934년 이종우·이병규(李昞圭)·이마동·공진형(孔鎭衡)·임용련(任用璉)·백남순(白南舜)·장발(張勃)·길진섭(吉鎭燮)·김용준(金瑢俊) 등과 함께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牧日會)를 조직, 회원전을 가졌다. 다음 해인 1935년에는 다시 이마동·김응진(金應璡) 등과 서양화가 단체인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였다.

다이헤이요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을 전후해서 이미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비평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이외에도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창문사(彰文社) 일을 도우면서 문인들과도 넓은 교우 관계를 가졌다. 특히 문단의 귀재로 알려져 있던 이상(李箱)과는 오랜 지기였다. 문단에서 이상이 전위적인 활동을 통해 이단적인 존재로 돋보인 것처럼, 그는 화단에서의 이단적인 존재로, 고전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당시 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야수파적이고 표현파적인 작풍을 시도했다. 강렬한 원색조의 사용, 격정적인 터치, 형태의 단순화와 왜곡을 통하여 내면적 감동을 전달하려는 야수파와 표현파의 경향은 그의 자학적인 저항 정신과 일치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가장 표현파적인 화가로서 평가되고 있다.「비파와 포도」ㆍ「여인」ㆍ「나부」ㆍ「우인상」 등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련의 작품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의 야수파·표현파 경향의 대표작으로도 꼽히고 있다.

광복 후 한때 미군정청 문교부편수국에서 미술 교과서를 담당, 편찬하였다. 그리고 6ㆍ25사변 중에는 마산과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서울신문』제작에 참여한 것이 그의 마지막 활동이 되었다. 1954년에 이인성·김중현 등과 더불어 유작전이 열렸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더불어 시화첩인 『허둔기(虛屯記)』가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