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소림 - 일상의 저편

2014.10.02 ▶ 2014.10.12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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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일상의 저편 캔버스에 유채, 227.3x181.8cm stick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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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강건너 기슭에서 I 캔버스에 유채, 116x72cm stick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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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강건너 기슭에서 II 캔버스에 유채, 116x72cm stick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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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강건너 기슭에서 III 캔버스에 유채, 116x72cm stick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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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흐르는 강물처럼 캔버스에 유채, stick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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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일상의 저편 전시전경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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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응시된 기억 캔버스에 유채 plaster, FRP, stick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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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소림

    전시전경 부분 2014

  • Press Release

    연속적 흐름을 생성하는 차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일상이란 이것저것이 혼재된 모호한 현실을 싸안는 만사형통의 단어가 되었지만, 차소림이 ‘일상의 저편’ 전에서 주로 문제 삼는 일상은 그 언어적 속성이다. 매체로 포화된 현대에서 이러한 일상성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언어는 심심풀이로 떠드는 수다부터 법적인 강제조항에 이르는 폭을 가진다. 그것은 또한 무의식적 차원에서 의식적 차원까지,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까지, 정신적 차원에서 물질적 차원까지 두루 관통하며 우리의 현진실을 중층 결정짓는 요소이다. 언어적 일상은 공기와도 같이 편재하지만 그것이 마냥 편리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 언어적 일상을 잘 내면화하여 수월하게 헤쳐 나가지만, 어떤 이는 거기에서 저항감을 느낀다. 맞지 않는 옷처럼 이물감이 느껴지는 이 환경화된 실체, 또는 관계는 인간이 자연 아닌 문명 속에서 살고 있음을 증거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에 반쯤은 걸쳐있기에 언어적 현실은 그 혜택만큼이나 폐해로 다가온다.

    효율이나 실증이라는 명목아래, 모든 것을 확립된 언어로 환원시키려는 세상의 압박은 거부감을 준다. 세상은 중심의 언어와 주변의 언어로 나뉘어져 있으며, 언어는 소통만큼이나 단절을 야기 한다. 예술가란 그러한 질서에 편승하기를 거부하면서, 언어를 변화시킴으로서 일상도 변화시키려는 야심을 가진 자가 아닐까. 언어라는 도구가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인간사회의 질서를 틀어쥘 때, 작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언어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언어적 일상의 틈을 벌리고 어떤 변화를 시도한다. 언어의 자율성을 인간 위에 군림하는 질서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적 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지점으로 삼는 것이다. 전시장 여기저기에 놓인, 하얗게 연마된 언어의 파편들은 언어를 연마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작가가 언어를 연마하는 것은 일상에서 타인들보다 더 잘 말하기 위해서, 또는 확립된 일상을 장식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체로 현대예술가들의 언어는 통상적인 소통과는 거리가 있고, 장식은 더더욱 아니다. 차소림은 일상이 아니라, 일상의 저편을 응시한다. 그러나 언어적 일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만은 없다. 사회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위치가 그렇고, 그 안의 작은 해방구라고 할 수 있는 예술 또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물론 주체조차도 언어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 지배적 언어로의 완전한 동화는 기존의 질서를 재현하는 것에 머물고, 언어가 없는 상태란 무의미한 정신분열을 낳을 뿐이다.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광기는 예술에서 예찬되기도 하지만, 예술과 광기는 차이가 있다. 예술과 광기를 하나로 보는 것은 예술가의 전설이나 신화에 불과하다. 이성이냐 광기냐, 그 어느 한편으로의 귀결은 오히려 편리할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이성 속의 광기를, 광기 속의 이성을 논해야 한다. 이성이든 광기든, 언어는 양자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차원이 된다.

    차소림의 작품에서 언어적으로 규정된 일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중적 속성으로 나타난다. 전시는 언어와 언어너머, 존재와 부재 간의 역학관계와 숨바꼭질이 일어나는 장이다. 작품 곳곳에 있는 언어와 그 파편들은 물인지 바람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유동적 요소들 사이에서 수수께끼같은 사물로 출몰한다. 그림 안팎의 언어의 파편들은 조약돌처럼 닳아있거나 어디선가 막 생겨나려는 듯한데, 그것은 언어에 내재된 역사성과 시간성을 예시하는 듯하다. 그것들은 어떤 힘에 의해 반쯤은 가려져 있거나 사라지는 듯이 보이지만, 그림 안팎에서 여전히 현존한다. 그림 속에서 그것은 다른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얀 물감튜브에서 짜낸 덩어리처럼 그 물성을 드러낸다. 화이트 큐브 안에서 하얀 표면을 가진 기호의 파편들 역시 눈에 띔과 띄지 않음 사이에 존재한다. 사실, 언어 자체가 부재의 증후이다.

    2차원 상에서든 3차원 상에서든, 하얀 덩어리들은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파편이라는 물질성을 표시한다. 언어적 요소는 맥락성이나 완결성을 잃고 물질화되어 그림 안팎을 떠돈다. 표면이 부드럽게 갈리고 닦여진 하얀 덩어리들로 가시화된 언어의 파편들은 명확한 의사소통의 기능을 잃고 시적인 사물로 변해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그림자를 비롯한 주변의 작은 변화도 수용할 만큼 예민하다. 그림 속 장면이나 전시장 전체는 유적지처럼 띄엄띄엄 놓여있는 언어적 요소들이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탁자나 상자 등에 놓여 있는 언어의 파편들은 밖으로 꺼내어진 무의식적 요소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품 [일상의 저편]은 그림이 바닥에 그냥 놓여있고 하얀 박스와 계단, 언어기호들이 안팎에 배치되어 있으며, 어딘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진 이미지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림 안에 있는 것이 바깥에도 있고, 전시장 안에 들어와 작품을 보는 이들의 행동과 상황 또한 반복된다.

    가령 계단을 몇 개 내려와야 진입할 수 있는 전시장에서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은 계단 위의 인간들을 볼 수 있다. 무의식의 차원으로 내려와서, 무의식이 승화된 작품을 바라다 본다. 계단은 그림속에도 등장하면서 여기저기 불연속적인 시공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계단은 여기와 저기를 이어준다. 차소림의 그림에서 여기와 저기는 불확실한데 계단만 확실하다. 그것은 언어의 기능처럼,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가는 중성적인 수단을 표현한다. 현실은 언어라는 허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에, 현실/허구는 선후를 가릴 수는 있어도 경중을 가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차소림의 작품에서 언어는 투명성을 거부하며, 곳곳에서 자신의 물질성을 주장한다. 그림 속에서 언어적 요소는 유동적 흐름에 저항하며 서있고, 그림 밖에서 하얀 언어의 덩어리들은 읽히기 보다는 조형적으로 다가온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이러한 트임과 호환성은 어떤 닫힌 환원적 체계를 거부한다.

    그림도, 언어도, 주체도 관계망 속에 존재할 뿐, 그자체로 온전히 서있을 수는 없다. 관계들은 각각의 존재보다 더 유연하고 그래서 강력하다. 작품 [강 건너_기슭에서]는 3개의 그림을 따로 또 같이 붙여 놓았다. 그림 안에 있는 차이(균열)와 흐름(연속)이 그림 사이에서도 관철된다. 바람, 구름, 물, 또는 붓질 그자체처럼 보이는 유동적 흐름들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박혀있고, 기호의 파편과 접어 세워놓은 종이처럼 보이는 각진 구조물이 있다. 인간은 매우 작고 대부분 자기들끼리 상호관계가 부재한다. 그들은 소비자나 관광객 같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나타난다. 언어로 이루어진 풍경, 언어가 기후적 현상으로 나타날 만큼 총체적인 환경이 된 그곳에서 주체의 위상은 크지 않다. 말과 인간은 관광지와 관광객처럼 낯설게 만난다. 그것은 소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즉 그것은 언어로 이미 구조화된 세상에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나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낸다.

    현대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언어를 말하기보다는,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해진다. 사회의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언어적 그물망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언어, 또는 구조 중심적 사유에서 인간의 위상은 초라하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도 행복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 시대의 과도한 주체 중심적 사유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간이 사라지거나 주체라 할 수 없을 만큼 타자화 되는 현대미술의 양상은 현대문화의 전반적 흐름과 함께 한다. 어떤 지시대상으로 귀결됨 없이 자유롭게 칠해졌지만 동시에 어떤 지형지물이나 기후적 현상을 암시하는 풍경은 멋진 유토피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그것은 언어, 자연, 인간 같은 이질적인 것들이 부드럽게 연결된 헤테로토피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은 동시에 길을 잃는다. 스티커로 만들어 붙인 인간들은 낭만주의 풍경화나 동양의 산수화 속 인간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풍경과는 이질적이다.

    인간이 만들어냈고, 인간을 만드는 언어적 환경은 조화롭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로 간의 차이와 간극 역시 감흥을 자아내는 요소이다. 작품 [흐르는_강물처럼]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간에 텔레파시처럼 통하는 어떤 기운이 있다. 사실, 차이와 간극은 언어적 소통에 있어 주요한 요소가 된다. 총체성이라는 보편적 지식인의 이상이나, 하나 됨이라는 낭만주의적, 종교적 이상과 달리, 다름과 차이는 서로의 소통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된다. 어떤 작품에서 차이와 간극은 적당한 긴장을 넘어서 위기감을 준다. 미술관 벽 위에 자그맣게 설치한 작품들이 그렇다. 작품 [기다리며_바라보며_흐르는_물_옆으로]와 [기다리며]는 골판지위에 그러진 작은 이미지가 미술관 벽에 튀어나온 하얀 선반들 위에 놓여 있고, 선반에서 흘러내리는 실타래들을 보여준다. 작아서 더욱 고립무원처럼 보이는 섬들은 세계와의 연결망이 끊어 진채 그렇게 작은 소우주들을 이루고 있다.

    그림 안에서의 흐름은 하얀 절벽에 막혀 바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 그 바깥의 세상은 또 그 나름의 흐름이 지배할 것이다. 이 두 흐름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서로간의 다름이 소통을 위한 필연적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써 봉합되어야 할 장애로 여겨지는 한, 예술과 현실은 화해하기 힘들 것이다. 일상의 저편이 아닌 일상의 이편에 예술이 있는 세상은 차이를 축복하는 진정 다양한 사회일 것이다. 하나의 언어가 아닌 서로 다른 언어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이해를 위한 거리를 무한한 유희의 장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배하는 언어는 점점 단순해지며, 그래서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세계각지의 다양한 언어는 생태계만큼이나 소멸의 위험에 놓여있으며, 언어는 조건반사를 야기할 뿐인 단순한 약호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참지 못한다. 그리고 차이란 권력으로 결판이 나고 만다.

    갖가지 스펙터클이 범람하는 현대가 권태를 더욱 부채질 하는 이유는 지배적인 코드들 간의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코드가 지배적일 때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흡수일 뿐이다. 조화가 아닌 동화일 뿐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주체는 비대화되었지만, 그 주체를 채우는 것들이 모두 같다는 것, 그래서 권태 한 켠에 가혹한 경쟁과 전쟁이 빈번하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일상이라는 가장 많이 호출되는, 그래서 상투적인 개념을 앞세우면서도 그 일상을 채우는 언어적 실재와 관계를 부각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일상을 이루는 다양한 실타래에서 언어를 부각시키는 전시 ‘일상의 저편’은 동시에 ‘언어의 저편’--2010년 개인전 부제이기도 했다--으로 다가온다. 일상, 또는 언어의 저편에는 신비와 무한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상의 기계적 반복을 멈추게 할 근본적인 변화의 원천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차소림의 작품에서 출몰하는 타자는 때로 절대적 타자(신)로 현시되곤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우주 속에 인간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전능한 시점도 발견된다.

    물 흐르듯 자유롭게 흐르는 부드러운 풍경에는 자유롭지 못한 일상의 진실이 깔려 있으며, 그림 안팎의 하얀 사물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증거 하는 언어의 형해로 다가온다. 차소림의 작품은 여러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묶어낼 수 있는 풍경의 형식을 취하지만,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에서 확실한 모양새를 갖춘 것은 어디에선가 찍어온 구경꾼들 뿐이다. 각각의 맥락에서 탈맥락화되고, 작품 속에서 재맥락화된다. 현대인을 특징짓는 구경꾼들은 빽빽하게 짜여진 일상적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난다. 인간의 크기가 작기에, 상대적으로 배경은 더욱 광활해 보인다. 그들은 대부분 어딘가를 본다. 그래서 그들을 보는 관람객들은 그들과 같이 저편을 보게 된다. 지금 여기를 넘어서는 또 다른 시공간이 계속 암시된다. 작은 인간의 이미지를 삽입함으로서 풍경은 기념비적 차원을 획득한다. 인물이 사진에서 유래한 명확한 도상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배경은 더욱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무의미한 붓질로 와해되지는 않는다.

    인간과의 관계망을 통해 붓질의 우연적 흐름은 산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될 수 있다. 인간을 나타내는 도상과 붓질 간에 놓인 스케일의 격차는 결코 크다고 볼 수 없는 붓질을 확대한 것 같은 효과를 주며, 확대라는 점에서 무의식적 요소가 전면에 드러난다. 일상에서, 무의식적 선의 진정성은 필적 감정 등에 활용되기도 한다. 우연은 어떤 맥락을 통해서 우연 이상의 것이 되고 자유로 고양된다. 인물들은 맥락만 모호하지만, 배경은 어떤 형태도 결정적이지 않다. 이건가 싶으면 저것 같다. 그리고 간극들 사이에서 잠재적 공간이 계속 생겨날 수 있다. 거기에는 한 번의 생성이 아니라, 연속적인 생성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막힘없는 생성을 요구한다. 재현이 아닌 생성의 차원은, 언어적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이 동일자가 아닌 타자를 말할 수 있는 계기를 말한다. 새로운 것을 말해야할 과제를 가지는 작가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차이에 따라서 어떤 기후적 흐름이 생겨나듯이 차이는 흐름을 만든다.

    간혹 박혀있는 언어적 요소 때문만이 아니라, 차소림의 그림과 설치는 차연에 기반 하는 언어적 속성을 내장한다. 풍경 또는 장면 속 요소들이 서로가 밀고 밀리면서 미끄러지는 관계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일 대 일 관계가 아니라, 미끄러지는 관계를 주장한 후기구조주의의 사고와도 닮았다. 지우기와 그리기가 잘 구별되지 않는 차소림의 풍경은 말소되지 않는 차이의 흔적이 있다. 해체주의처럼 언어는 탈중심화 되고 불확실한 기원을 대신하는 대리와 보충도 발견된다. 어떤 한 개념의 의미를 찾기 위해 연속적으로 사전을 찾아야 하는 경험처럼, 언어는 실체가 아닌 관계를 통해 작동된다. 작가는 산을 그리려 하면 산이 안 그려지고 바람을 그리려 하면 바람이 안 그려지기 때문에, 산이나 바다를 생각하면서 붓을 놀리고, 궁극적으로 산이나 바람이라는 생각조차도 놓고 가려한다. 붓질의 자유로운 에너지가 살아있는 차소림의 회화는 손과 의식을 넘어서 몸과 무의식을 투척한다. 산을 알지도 못하고 산을 규정하려 드는 언어적 횡포에 맞서, 산을 알기위해 스스로 산이 되려 한다.

    존재를 감싸는 불확실한 운무들은 되기를 위한 적절한 바탕이다. 이 야생적 바탕 위에서 기존의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가 아닌, 되기의 차원은 변해가는 와중에 있는 언어적 형상에도 발견된다. 언어는 그자체로 완전하거나 투명한 중성적 도구가 아니라는 점은 시적인 가능성으로도 다가온다. 기호 형상을 이루는 하얀 덩어리들은 석고를 깍아서 만들거나 그것을 FRP로 확대한 것이다. 잘 연마한 민감한 표면은 든든한 반석 같은 견고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각난 하얀 덩어리들은 언어자체보다는 언어적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변형을 연상시킨다. 언어는 자족적이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럴 것이라는 기대치는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여러 차원의 맥락을 통해 보충된다. 그러나 보충의 원천이 될 여러 차원들이 하나하나 소멸해 간다면 불완전한 언어적 현실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그러한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가장하면서 군림하고, 인간을 안팎으로 규정한다. 차소림의 작품에는 인간을 작게 하는 언어의 거대한 위상이 있다. 그림 속에 풍경화 된 언어가 나오는 구도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대화의 기술]을 떠오르게 한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언어적 형상은 하단부에 꿈(Reve)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돌무더기 근처에서 사람들이 있는 풍경이다. 돌 글자는 작은 인간들에 비해 기념비적인 차원을 획득한다. 미셀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그 작품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들 자신의 고유한 말을 이루어내고 있다’고 묘사한 바 있다. 소외와 자유가 한끝 차이일 수 있듯이, 여기에서도 언어의 자율성은 두 가지 계기가 있는 것 같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속의 말은 무엇인가를 확인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푸코는 거기에서 현대적 인식론을 발견한다. 푸코에 의하면, 마그리트는 유사(類似, ressemblance)에서 상사(相似, similitude)를 분리해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로 작용하게 한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모든 구도들 위로, 그 어떤 참조 틀로도 고정시킬 수 없는 상사체들이 활강하고 있다는 점, 그것은 출발점도 지주도 없는 이동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림이 확언이 아니라는 것, 자신 외에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게 되는 에테르 속으로 끝없이 피어올라가도록 둘 것을 제안한다. 차소림의 작품 또한 푸코가 말한 의미의 비재현적이고 비확언적 공간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표류하고, 이상한 관계가 맺어진다. 스티커로 부착된 인간 이미지를 비롯한 작품 속 드문드문 보이는 재현적 요소는 관계망을 위한 교차점일 뿐, 그 자체의 실체감이나 의미는 없다. 작가는 기존의 언어에서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림이나 그림들 사이에서 찾고자 한다. 기존의 언어세계에 변화를 위한 도전장을 내는 것은 몸과 무의식이다. 차소림의 상상적 풍경에는 상징계와 현실계 사이의 긴밀한 역학관계가 있다. 회화는 어느 매체보다도 이러한 도전과 실험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매체이다.

    전시제목차소림 - 일상의 저편

    전시기간2014.10.02(목) - 2014.10.12(일)

    참여작가 차소림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금호미술관 Kumho Museum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 )

    연락처02-72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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