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팔한 師弟同行
2012.05.18 ▶ 2012.06.15
한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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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어렸을 때처럼 낯간지럽게 스승의 노래를 부르거나 카네이션을 접지 않았다. 대신 감사한 분들에게 카드를 쓰고(편지 쓰는 것이 굉장히 서툰 데 불구하고) 작은 선물도 드렸다.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과 특성상 동기들이랑 교수님과 함께 행사를 계획한 적도 없었고, 교수님들 중에서 ‘스승’이나 ‘멘토’라고 부를만한 분은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씁쓸하다. 그런데 이번 <팔팔한 師弟同行>전은 내가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사제간의 돈독한 정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홍익대학교 동양학과 한진만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리며, 그의 88년도 제자들 15명은 스승과 함께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팔팔한 師弟同行>전을 열었다.


한진만 교수는 24년간 교편을 잡았다면 수많은 학생들을 알았을 텐데, 왜 그 중에서도 88년도 제자들과 전시회를 열었을까. 1988년도는 한진만 교수가 처음으로 부임한 해였다고 한다. 다른 교수들보다 88년도 입학한 학생들과 나이 차가 비교적 적었을 테니, 동양화를 통한 예술과 열정 공감을 나누기 더 쉽지 않았을까? 그리고 88년도 동기 중에서는 화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그 해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서울올림픽이 열렸었다. 고도의 경제 성장 이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회 문제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 들었고, 이런 격동의 조짐은 지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기의 대학생과 그의 학구 동반자인 교수에게 강한 유대감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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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의 크기는 굉장히 큰 편이다. 보통 동양화라고 생각하면 심사임당이 그릴 법한 크기의 작품만 떠올렸던 내가 부끄러워질 만큼 크기나 필체가 대담한 작품들이 많다. 스승인 한진만 교수의 작품을 보면 흰 세계에 사람의 손이 붓과 하나 되어서, 얼마나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는 지 반추할 수 있다. 흰 세계 속에 뻗어있는 단단하면서 절도 있는 검은 윤곽선, 연기색, 심해색의 음영—스승은 한국산수화를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한 필체로 표현하였다. 배경장소도 꼭 한국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아름다운 산들을 강렬한 붓으로 잡아냈다. 그의 작품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심원법으로, 마치 심원에서 하늘 위로 뻗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금강산>은 산이라기보다 중심부에서 활짝 열려 하늘을 향해 핀 웅장한 모란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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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승과 함께한 제자들은 동양화에 대해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가장 크게 보면 동양화, 수묵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한국성과 자신의 예술성에 대한 고찰이었을 것이다. ‘한복에다가 레이스 쪼가리를 붙이고 그것을 한국의 미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고 우기지 말라’고 꼬집었던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님의 발언처럼, 얄팍한 꼼수를 부리고 그게 자신만의 ‘전통 해석’이라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의 국적에 따라 오는 전통을 알고, 스승과 동기들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연마하며 나중에는 홀로 걸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쌓아 올리는 것. 여기에 참가한 15명의 제자들은 그 긴 고찰과 자신의 답을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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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흰 색 세상에 산이 있고 물이 흐르는 그림들이 있다. 앞서 말한 스승의 그림처럼 수묵화거나 진경산수화인 그림들이지만 제자들 자신만의 개성이 묻어나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처음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것은 동화삽화처럼 산의 나무 하나하나 점으로 표현한 박병춘의 섬세한 작품이다. 여백으로 표현된 광활한 바다에 붉은 파라슈트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기자기한 맛과 시원스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박서령의 흰 색 세계는 생명의 기가 붓길을 통해서 자연물의 곡선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다. 안성구의 작품은 강하고 두터운 필체가 눈에 띄며, 마치 무진처럼 안개에 가려진 풍경은 이곳이 정말로 존재하는 곳인가,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보게 한다. 전숙인의 작품들처럼 먹의 농담이 자유롭게 대담해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있는 그림들도 있고, 화려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가을 이미지가 연상되는 따뜻한 색깔의 숲과 멀리 보이는 푸른 기와의 대비가 아름다운 양홍수의 작품도 감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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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에는 한 눈에 ‘한국적인 모티브’가 있음이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김재애의 작품은 바탕에 태극기 그림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고, 그 위에는 앙증맞은 유리 고추들이 귀걸이가 진열된 것처럼 걸려 있다. 사회는 국제 사회로 변한다고 하는데, 아직 서양식 악수보다는 허리 굽히는 인사가 더 친숙한 내 자신이 생각나면서 내 마음 속에서 ‘한국’이 다른 요인들과 충돌하고 갈등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내적 갈등 속에서도 조용히 빛나고 있는 자아의 축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봉은영의 작품은 우리나라 부적과 화투 그림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냈다. 나쁜 일을 막고 좋은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부적을 현대인들을 위해 ‘조금’ 더 크고 현대적인 색채로 풀어주었다. 다채로운 색감의 작품들과 대비되는 윤희정의 작품들은 한지라는 우리 고유의 소재로 정적이면서 깊은 공간감을 표현했다. 멀리서 보면 투박한 판화인가 생각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세한 표현이 살아있는 은빛 나비, 그리고 금빛 바다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통해 조용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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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과 임진성의 작품들을 보면 확연히 대비되는 색 때문에 눈에 강렬한 잔상이 남는다. 둘 다 사람의 내면을 관념적으로 드러냈는데 이용석의 세상은 주홍색의 밀림으로, 아프리카나 남극 동물들, 외국 식기들이 부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울타리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표현했다면 임진성의 푸른 세상은 시원하기도 하고 얼음처럼 차가워, 거친 붓길에 폭발과 용솟음이 있다.


마지막으로 ‘융합’이 큰 테마로 작용하는 작품들이 있다. 자유분방한 붓질과 오방색의 조화, 그리고 뭉뚱그려진 동물 형상들의 융합을 통해 이질적 요소들이 새로운 맛을 선보이는 김정희의 작품들. 그리고 노래이자 글인 우리네 시가 알록달록한 꽃과 오버랩되어 시의 글귀가 꽃이 되고 꽃이 시의 일부가 되는 홍지윤의 꽃밭. 미끄러질 듯한 곡선 안에 이국적인 네온빛깔로 빛을 발하는 전구 안의 꽃들—안진의의 전구 속의 꽃들은 화려한 빛이 되어 이 세상을 밝히는 전구가 된다. 마지막 차례인 김명규의 작품은 육안으로 보는 것으로 렌즈를 통해서 보는 것이 더 영롱하다. 렌즈를 통해 보면 알록달록한 색깔의 강아지들과 해바라기 위에 흩뿌려진 물방울들이 더욱 더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붓놀림처럼 물방울 역시 즉흥적으로 흩뿌려지고, 배경과 엉겨 붙어 기묘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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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원미술관에 들어갈 때는 규모가 작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총 16명이 참가했으니 작품 수도 많고 대작이 많아 시원스런 맛이 있다. 스승과 함께 키운 한국화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느껴지거나, 관련이 없어 보여도 개성의 일부는 여전히 그 애정과 연관이 있는 작품들. 전시 입구에 걸린 포스터에는 대학생 시절의 작가들과 지금보다 주름이 덜한 스승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려있다. 24년 전 함께 청춘과 낭만, 예술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던 이들이 다시 한 번 만나 스승과 함께 조촐한 오프닝파티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미술관을 떠났다. 과연 나는 24년 후, 누구와 기쁘고 그리워지는 재회를 할 수 있을까.

 

뮤움닷컴 인턴기자 홍지수
2012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