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시작. 그리고 진정한 공간(Aufbruch. Malerei und realer Raum)
2012.5.4 - 2012.7.1
베를린예술원(Akademie der Kün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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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만약 우리 삶이 고대 신들처럼 영원하다면, 에피소드 개념은 그 본래 의미를 잃는다. 무한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어느 날엔가는 어떤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불멸』 중에서

 

1.
우리의 삶은 본래 3차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3D영화를 보고 즐거워하고 신기해 할까? 아마 벽에 붙어있어야 할 영화(2D)가 실제처럼(3D)처럼 느껴지는 것이 새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2차원이라고 생각하는 회화가 3차원의 세계로 넘어온 것은 3D영화보다 훨씬 오래 전 이야기다(20세기 중반). 아마도 2차원과 3차원에 대한 고민, 회화는 항상 네모난 캔버스에 갇혀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과 탐구가 이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공통적으로 묶어주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회화로부터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보고 싶은 것(욕구)을 떠나서 회화에게 “회화는 이러해야 해”와 같은 어떤 의무, 당위성, 권리를 부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나? 그렇다면 그러한 관람자의 권리는 회화에게─화가들에게─ 굉장한 ‘부담’ 이자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역으로 이것이 앞의 물음과 같은 깊은 탐구를 낳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2.
전시장으로 가 보자. 들어가자마자 초록색 벽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독일 작가 Gerwald Rockenschaub의 설치작품(2012)이다. 맞은편 새하얀 벽 위에 써 있는 작가의 이름과 Rauminstallation(공간 설치), 2012라는 숫자를 확인 하고서야 본인의 생각이 완벽히 무너졌음을 알아챘다. 누가 벽을 벽이라고 생각하라고 정해놓았던가? 아직까지도 캔버스, 오브제에 익숙한 우리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당혹감을 느낀다. 미술의 역사를 그렇게나 배워왔음에도, 우리는 소위 “‘쿨’함의 미학”으로 자기 스스로를 몰고가지 않았던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쿨’하게 고개를 끄덕여놓고는, 이런 작품을 보면 작품이야? 하고 되묻고, ‘그림’하면 네모난 캔버스를 먼저 떠올리는(기대하는) 것이 우리다. 이렇게나 ‘고정관념’은 집요하다. ‘쿨’의 가치를 모두 휩쓸어 가버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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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 혹은 권리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권리’라고 정당화시켜 말하는 것은 종종 그들의 ‘욕구(욕망)’일 때가 있다. “나는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어(나는 음악을 듣고 싶어!)”, “나는 좋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어(나에게 좋은 대우를 해 줘!)”. 권리와 욕망이 이따금씩 혼동되어 사용되는 요즘, 우려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시각체험에 있어서 본인을 포함한 우리들이 ‘권리’를 내세우며 ‘욕구’를 표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볼 권리가 있나? 물론 있겠지만, 우리의 보고자,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를 ‘권리’라는 말로 포장한 것이라면,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솔직하게 말 하자. “새로운 것을 보고 싶다”고. 그것이 예술을 앞에 둔 우리의 솔직한 자세가 아닐까.
Bridget Riley의 작품 ‘Continuum(1963/2005)’을 ‘체험’했을 때의 느낌이 바로 정직하게 말해 ‘새로운 것’의 체험이라 생각했다. 만약 작품 만들어졌을 당시─1963년─의 사람들이 경험했다면 더 놀라워했을 것이다(그만큼 더 반감도 있었겠지만). 네모난 캔버스의 예술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감상하는 사람에게 다가왔을 때, 시각적인 체험만이 아닌 공간적 체험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I wish somebody would give me a wall to destroy. I mean, to make it no longer seem a wall.
-Bridget Riley, 1964

그렇다. 부숴버리면 2차원이 3차원으로, ‘공간’이 된다.

 

 

4. 진정한 공간?
그렇다면 2차원의 벽을 꼭 ‘부숴야만’ 했을까? 벽에 걸린 채로, 최소한의 회화라는 영역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관람자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작가들도 많이 있다.
단순히 ‘규칙에 대한’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그림 앞에 서 있을 관람자에게 굉장히 감정적으로 강하게 다가온다. ‘어떻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이렇게 네모난 캔버스 안에 가둬졌을 때 더 폭발적으로 나타나 감상하는 자에게 말을, 손을 건넨다. 침묵의 역설, 단순함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이미 생(生)에서 배워왔다. 백 마디 말 보다 단 한번의 따뜻한 포옹이, 그리고 수십 문장의 기교 있는 소설의 구절들보다 마음을 꿰뚫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네모난 캔버스에 거칠게 뚫은 까만 구멍 하나가 감상하는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면 이 작품은 우리에게 공간을 선사한 것이 아닐까. 2차원에 머물러 시각적인 어떤 것만 제공한 것이 아닌 ‘3차원 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관람자의 ‘인생’에 관여한 것이 될 테니 말이다.

 

 

5. 낭만적 미니멀리즘, 휴머니즘적 뺄셈
낯선 이국 땅의 전시장에서 이우환의 작품을 앞에 두고, 반갑다는 감정보다 더 앞선 감정이 있었다면, 옆 작품과 너무 가깝게 배치된 작품의 위치에 대한 아쉬움의 감정이었다. 새하얀 벽에 걸린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면,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상황이 그렇게 됐어” 같은 일상적인 핑계처럼, ‘대화’의 장소가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2차원의 회화가 많은 것을 생략하고 벽에 걸려있을 때, 우리는 그와(그 회화작품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즉, 작품과 나 사이 공간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도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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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 어렵지만 아름다운 것, 상처와 긴 아픔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해야 함에 대한 답은 없다. 없을 것이다. 텅 빈, 단순한 캔버스를 마주하면서 그 속에 꽉 들어찬─그러나 비 가시적인─ 많은 이야기를 낱낱이 알 수는 없겠지만, 전해오는 감정이 이루 말할 수 없다면, 미니멀리즘은 낭만적인 고집스러움이다. 캔버스에 더 이상 남아있을 것이 없을 때까지 빼고 또 빼는 그러한 뺄셈이, 앞에 서 있는 감상자에게 진실된 말을 걸기 위함이라면─‘관계’라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의 계속되는 뺄셈은 철저하게 휴머니즘적이다. ‘-이즘’, ‘-주의’가 불편하다면 다 잊어버리고, 다 내려놓고 털어버린 작품 앞에 직접 서 있어보자. 과연 이것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지 직접 느껴보아야만 한다. 얼마나 많은 말을 건네고 있는지, 점 하나, 선 하나가, 파랗기만 한 이브 클라인(Yves Klien)의 캔버스가, 무슨 말을 그토록 건네는지.

 

 

6.
만약 우리 삶이 고대 신들처럼 영원하다면, 에피소드 개념은 그 본래 의미를 잃는다. 무한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어느 날엔가는 어떤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불멸』 중에서

 

우리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게다가 무슨 제약은 그렇게나 많은지, 크게는 시간, 공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3차원’이, 작게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 역할, 내가 내게 요구하는 만족감의 잣대, 육체 이 모든 것이 브레이크를 건다. 영역을 좁혀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보자면(이렇게 영역을 좁히는 것도 하나의 제약일 수 있겠다), ‘캔버스’가 그 규칙이며 제약이며 동시에 장벽이기도 하며 약속일 것이다─물론 현대에는 많이 옅어졌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영원하지 않음에 대해 생각 해 본다면─캔버스의 유한함, 네모라는 규칙─ 이 규칙은 캔버스 안의 하나하나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이다. (반대로 크리스토 부부(Christo and Jeanne-Claude)처럼 자연과 대지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시각적으로 ‘침묵한’ 이 전시들의 작품들은, 입을 다문 대신 감상자들과의 대화의 장을 열고, 이야기를 해 주고, 많은 이야기를 스스로 담았다. 아마도 이것이, ‘시작’이라는 말을 부여할 수 있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가끔은 굉장한 우연과 인연으로 이 세상은 3차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듯,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에게’ ‘다가오는’ 작품들이 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2차원 캔버스에 불과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생에 영감을 주고 말을 걸어오는 작품들을 마주하는 순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소통은 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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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특파원 - 김근하
(2012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