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정: 사라지지 못한 먼지들
2019.05.21 ▶ 2019.06.02
2019.05.21 ▶ 2019.06.02
우민정
sing for eric 1 2018
우민정
Listen 27.5x41cm, 마, 황토위에 혼합재료, 2019
우민정
NOW, Sing! 29x21cm, 마, 황토, 백토위에 상감, 2019
우민정
WHAT MORE IS YOU LOOKING FOR 29x21cm, 마, 황토, 백토위에 상감, 2019
우민정
귀들이 웅성인다 5x14cm_8ea, 황토, 백토,가변설치, 201
작가노트
벽이란 견고하다. 벽은 우리가 돌아갈 흙이다. 오래된 벽은 마치 움직이는 것 같다.
견고한 벽은 시간에 따라 흐르고, 시간은 지나가고, 순간은 잡을 수가 없다.
벽이 흐르고, 비가역적인 순간들은 그 벽 안에 박제되어서 연속하여 반복된다. 그 운동감은 의지를 가지고 사물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사물은 스쳐 지나가지만 그 벽과 공간은 기억을 지니고 있다.
벽 안에서 되풀이되는 기억은 벽화로 남는다. 옛 벽화는 죽은 것을 위로하고, 산 것에게 죽은 것을 기억하게 한다. 벽의 표면은 살아온 존재의 흔적을 기억한다. 우리는 순간을 중첩하여 살 수 없고, 동시에 이곳과 저곳에 존재할 수 없지만, 벽의 표면은 긁히고 깍아내어지고, 다시 채워지고 또 갈아내지면서 순간을 축적하고 중첩해간다. 긁히기 쉬운 흙벽화 표면은 예민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스쳐지나가고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한다. 도처에 살아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살아가고 당신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살아가려는 의지만큼, 모든 산 것들은 의지를 가지고 생명을 그어나간다. 할렐루야로 찬양하든, 모두가 부처라고 하든, 부처를 죽이든, 예수가 부활하든, 살아있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소리친다. 노래는 매춘이다. 노래는 다시 벽에 새겨진다. 다시 지워지고 다시 긁힌다.
흙 표면에 그려진 것은 나에게 그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지금이 아닌 언제,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상상하게 한다. 손을 대보면 서늘하다가 따뜻하다. 물을 뿌린 뒤 흙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위안을 가져다 준다. 고작 몇 분의 순간만을 기억하고 또 잊는 나에게 흙이라는 물성과 벽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기록하고 오래 생각하며 가까이 두고 가지고 놀고 싶은 것이어서, 흙의 물성과 표면효과인 마띠에르에 관해서 여러 해 사부작거려왔고 그것이 작업이 되었다.
텅 비거나 채워진 공간, 그래도 인식되는 그것, 혹은 존재하는 그것.
우민정 작가의 작업에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대해’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사유해온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 이야기들은 그가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주목하게 되었던 벽으로부터 시작된다. 벽은 공간과 공간을 나누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경계 면으로 작동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때 타자라는 것은 우민정 작가의 경우 사람이거나 사물일 수도 있고 공간이거나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그러한 것들인 것들로 보인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는 타자의 문제를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 풀어가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거품처럼 짧은 시간 사라지는 파도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에도 변화가 없어 보이는 바위를 소재로 하여 진행한 작업들은 특히 그러한 예를 잘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커다란 파도 형상의 부조 조형물이 보이는데 작가는 질감이 벽처럼 보일 수 있도록 합판에 황토와 백토를 사용하여 벽화 기법으로 작업하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는 파도에 대해 작가는 이를 작가는 작품 속에 오랫동안 잡아두고자 하였는지 벽화 작업 방식을 통해 견고한 물질이 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파도와 대비되는 바위의 형상은 파도 형상 중 도려낸 듯 제거되어 있는데 이는 공간성과 물질성을 소거해 버리고 바위가 있었던 형상적 공간은 텅 빈 공간으로 비워둠으로써 사물에 대한 일상적 사고를 일순간 역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파도의 형상을 다루는 작업 방식과 함께 전시 방식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작업한 파도의 형상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The Little Mermaid’의 한 장면을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파도 모양이 변화되는 것을 순차적으로 8개의 판에 나열하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파도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애니메이션처럼 시간을 분할함으로써 벽과 같은 물질에 포착된 각 순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감각할 수 있게 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시간을 벽과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일상적 물질로 번안하여 대상화함으로써 시각이나 촉각 등의 감각이 복수적으로 확인해 낼 수 있도록 한 것은 타자적 장소와 위치에서 감각되는 것들 특히 시간과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작가가 더 깊이 인식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 작업과 이어지는 ‘귀들이 웅성거린다’ 라는 작업은 투명 아크릴 판과 점토로 만든 귀가 놓여져 있는 모습이다. 작가는 삼불원(三不猿)이라 지칭되는 원숭이 설화로부터 차용하였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이 작업에 이어지는 연작을 진행하게 되는데 주위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듣는 일에 집중하여 텍스트들을 흙을 바른 표면 위에 기록하는 5개의 소품 연작으로 연결시키게 되는 작업이다. 작가는 여기서 그 이전 작업과 유사하게 벽이 주체와 타자 사이를 공간적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피부가 경계면이 되고 있고, 시각적으로는 창문이 그러한 경계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일부 신호나 언어를 주고 받으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나 서로 완벽하게 공통된 인식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작가가 제시하였듯이 인간의 여러 차원에서 경계면이자 불연속 지점인 피부나 벽이나 창과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생물학적 경계나 심리적 문화적 경계는 개체별로 상이하게 형성될 수 밖에 없기에 인간 사이에는 이 경계면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이는 인간과 세계의 구조적 한계로 작동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사물과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인식하고 알아갈 수 있는 한계인 경계면이 어느 곳엔가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해 온 작업들을 보면 이 경계면을 벽과 피부와 창으로 개념적 범위 내에서 차원을 바꿔 가면서 타자 혹은 외부 세계와 소통하거나 인식해낼 수 있는 방법을 부단히 탐색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실존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확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거나 혹은 적어도 최소한의 몸짓이 될 수도 있다. 작가가 이처럼 인간의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 안으로 타자를, 외부세계를 끌어 들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물질적 실체로 감각되기 어려운 시간을 물질화하여 보여주는 방식, 즉 광배(光背)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순간의 산물인 파도를 벽에 고착시키는 방식으로 혹은 반대로 물질적 실체를 텅 빈 공간으로 뒤집어 놓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물질이 있던 그곳, 물질이 사라진 그곳에 구조적 공간을 비워 역전시키거나 감각되지 않는 것들을 감각의 공간에 물질이 되어 있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작업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존재감이란 있던 자리에서 있었던 대상이 사라질 때 더 극대화 되어 감각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을 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다른 한편 감각할 수 없는 영역들도 물질적 차원으로, 감각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된다면 그 의미를 더 명료하게 직시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작가가 전시주제로 제시한 ‘사라지지 못한 먼지들’이란 물질적 존재가 비워진 바로 그 공간에서 아직도 무언가 물질처럼 감각하게 된 것들이거나 시간처럼 사라져야 할 대상이 지나간 흔적을 공간에 먼지처럼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물질적 감각을 전시공간에 제시해 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이러한 존재들을 인식하는 것에 관한 담론이자 작가적 고찰의 결과물들일 것이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고자 하는 관객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는 물질에 가려져 있는 것들을 시각이상의 감각을 통해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있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현대미술이 시각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고 시각예술이라 할 때 시각이 본다는 것을 넘어 인식 전반에 관련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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