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진: 축제展

2020.09.07 ▶ 2020.09.16

갤러리 담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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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흔들리는 밤 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 227x145cm, 201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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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커플 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 116x 97cm,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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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피에타 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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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광야에서 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 65x 53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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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나무를 옮기는 사람 판넬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 37x58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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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기도 장지에 채색, 한지 콜라주, 50x44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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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무제 먹나무에 한지, , 안료, 콜라주, 28.5x28cm, 2016

  • Press Release

    축제

    어둠을 향해 두 손을 뻗는다.
    손과 손 사이에 연한 바람이 맴돈다.
    나와 이웃과 침묵의 잔해.
    명멸하는 빛.
    흙으로 빚은 듯한 종이 인형.
    얼굴의 알 수 없는 빛과 얼룩의 향연.
    저마다 빛나는 얼굴들.
    얼굴은 자신이 빛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의 눈동자처럼, 오소서!
    인형은 소녀의 고백에서 태어났다.
    그네 뛰는 소녀와 그 아래의 어깨, 광대의 줄타기, 뿔난 이들, 광야에서의 경주,
    하얀 코끼리, 곡예사, 가면 쓴 이, 세례식, 나무를 옮기는 사람, 빛을 캐는 사람, 고독한 왕,
    광인의 행렬......현실의 안쪽과 바깥에서의 줄타기.
    선택 받은 이, 이방인, 여행자도 좋다.
    축제다.
    형제여, 주술이든, 충동이든, 여름 밤의 꿈이면 어떤가.
    두려움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그래, 축제다.
    ■ 김명진



    김명진-너무 어두운 화면에 출몰하는 검은 징후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아주 까만 바탕 화면에 희미한 윤곽, 선들이 점등한다. 그것은 시선에 마지못해 보여 지다 이내 어둠으로 묻히기에 망막은 이내 조바심을 낸다. 이 희박한 장면은 검정과 흰색, 아니 그것들이 뒤섞여 자아내는 이름 지을 수 없는 중간 톤의 색채를 거느리며 침잠한다. 극도로 절제된 색채는 먹색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제한된 색 안에서 금욕적으로 조율되고 반죽된다. 동양화 전공자로서 먹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시연하는 차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냥 캄캄한 배경에서 불현 듯 포착되는 기억, 장면, 무의식의 이미지를 출몰시키는 그림이기에 그런 색채가 요구되는 듯도 하다. 그러니 이 검은 배경은 우선 작가의 이미지가 배양되어 나오는 마음, 기억의 공간, 무의식의 지층, 이미지의 정원 등인 셈이다. 그림이란 애초에 명확한 것의 재현이라기보다 애매하고 잘 보이지 않고 결코 재현되기 어려운 것을 애써 포착하려 하는 일이자 막막한 ‘그것’을 포착하려는 절박한 시도이기에 저 검은 배경에서 기를 쓰고 나오는 그 무엇이다.

    김명진의 그림에는 마석(자연)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며 사는 일상의 장면이 들어있고 작은 정원에서 키우는 나무들과 보낸 시간, 함께 사는 사람과의 내밀한 심리적 관계,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비극, 유년의 추억과 순간순간 출몰하는 다양한 생각들, 무의식의 지층에 깔려 있는 것들의 출현 등 역시 혼거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풍경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것은 자신의 정원 안에서 자라난다. 이 ‘눈먼 정원’은 중의적 의미를 거느린다. 하나는 볼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무의식과 기억 등의 탐사와 발굴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의한 것인데 우리에게 타자는 결국 미지와 무지의 것이다. 영원히 알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가 삶이고 사랑이라면 그것은 ‘눈먼 정원’에서의 삶일 것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와 수묵작업으로, 그러나 조금은 색다른 방법론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작가는 캔버스 표면 위에 한지를 밀착시킨 후 그 위에 탁본한 화선지를 콜라주하고 다시 회화적 성형을 덧입혀 모종의 형상을 연출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이 출현하는 어두운 바탕은 심연 같고 혼돈 같아 모든 것이 은닉되고 매몰되어 있는 공간을 암시한다. 그것은 이미지를 회임하고 있는 거대한 기원이자 자신의 의식이 출몰하는 무의식의 바닥일 수도 있고 아직 몸을 지니지 못하는 것들이 탄생하기 이전의 혼돈된 원초적 공간, 혹은 식물이 자라나는 대지의 바닥, 모든 것들이 발흥하는 마음의 자리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 검은 바탕에서 이미지를 하나씩 건져 올리고 특정한 형상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생명체를 길러내는 농부의 손놀림을 닮았다. (근작에는 자연에서의 삶의 체험이 반영된 나무를 가꾸거나 옮기는 장면,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 등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는 우선 탁본한 자잘한 종이조각, 그 편린들이 모자이크처럼 조밀하게 붙여지면서 화면을 채운다. 농담의 차이에 따라 먹물을 머금은 여러 종이들, 특정 사물의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져 나온 탁본의 자취들이 조심스레 표면으로 불려와 부착되면서, 명암에 의한 차이에 따라 얼굴과 의복, 가느다란 선을 드러낸다. 손으로 찢어낸 거친 조각들은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탁본된 것/ 선염된 것들이라 먹물의 스밈과 번짐, 농묵의 편차가 그만큼 다채로운 것들이기에 그것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순간은 다분히 작위적/우연적인 결합으로 인한 연출에 해당하고 나아가 무의식적인 조우, 배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먹물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화선지 바탕 그 자체를 그대로 유지한 부분을 조심스레 배치하고 다시 붓질을 가해 형태를 어느 정도 추슬러 나가는 과정의 반복, 그러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근거에서 나온 조각들이, 의도되지 않은 먹물의 상황이 우연히 어우러져 빚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작업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유심히 그림을 살펴보면 이 자잘한 조각들이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조각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듯 구축해서 이미지를 만들고 먹의 농담변화와 칠해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과의 섬세한 차이를 고려해 원하는 장면을 구성해나가는 시도는 장인적인 기술에 의지해 있다. 기존 동양화 작업이 보여주는 모필의 구사, 붓질을 대신해 콜라주를 통한 손의 직접적 운용이란 직접적인 신체적 행위의 소산이고 이는 다분히 조각적 방법론이다. 붓으로 그리는 일보다 종이를 찢고 이를 표면에 밀착시켜 저부조의 깊이와 촉각적인 피부를 만들어내기에 그렇다. 특히나 얼굴 부분을 보면 매우 입체적인 느낌, 마치 흙으로 두상을 빚듯, 종이조각들을 점토처럼 다루며 하나씩 붙여나가 입체감을 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자개의 끊음질 기법’을 연상시키는 가는 선의 부착은 드문드문 이어지면서 어둡고 정적인 화면에 생성적이고 활력적인 기운을 비춘다. 이 가늘고 예민한 선은 무척 감각적으로 반짝인다. 그것은 일종의 선이자 끈이고 실뜨기의 실, 그네의 줄 또는 타인과 접속되는 관계의 연결고리인가 하면 수면의 파장을 암시하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등장한다. 붓으로 긋는 일반적인 선과 달리 얇은 화선지가 표면에 달라붙어 자기 존재를 희박하게 그러나 간절하고 질기게 구현하는 방식은 그것이 그림이자 그림 그리는 작가 자신의 존재론적 성찰로 이어지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번지게 한다. 화선지의 콜라주 작업에 해당하기도하는 이 선 역시 전체적으로 자개기법을 연상시킨다. 결국 그의 방법론은 먹물을 머금은, 붓질을 통해 선염으로 채우거나 탁본으로 마련한 조각들을 단호하게 어두운 배경에 조심스레 올려놓아 부착하는 일인데 이는 평면에 촉각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부조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화면에 올라와 붙은 조각들은 까만 어둠에 순간 섬광처럼 출몰하는 빛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잊고 있었던, 의식의 저편에 가라앉아있었던 혹은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던 기억이나 일종의 트라우마라 불릴 만한 것들이 서서히 출현하는 형국일 것이다. 다소 공포스럽거나 ‘언캐니’한 이 이미지는 그네를 타고 있는 어린 소년과 소녀로, 식물에 물을 주는 여자로, 어른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어린아이로(성인이 된 지금이 나를 여전히 지배하는 유년의 기억?), 눈을 가린 체 이상한 구조물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으로(사랑은 일종의 눈이 먼 상태), 실뜨기를 하고 있는 소녀로, 말에 올라탄 남자와 여자로, 땅이나 물위에 부양하고 있는 이들(현실로부터 유리된 혹은 뿌리 뽑힌 삶)로 출몰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황 속에서 마치 무언극의 배우들처럼 무엇인가를 연기한다. 과거의 공간이나 이상적인 상황, 혹은 잔인한 현실을 넘나들며 그리고 너무도 적막하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꼼짝없이 고립되고 정박당한 체 멈춰있다. 지독한 고요함과 기이한 환상성, 상징성으로 가득한 검은 장면, 이상한 징후들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명멸하면서 출몰했다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자꾸만 보였다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김명진 작업비평
    《암흑의 공간과 얼룩의 형상》

    평론: 이정은

    김명진은 작가 본인과 주변인들의 일상, 영화, 음악을 통해 얻은 인상적인 장면과 이야기들을 소재로 형상을 주조하고 화면을 구성한다. 하지만 화면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이기 보다는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검은 공간은 화면 속 인물 형상에 집중하게 하는 힘을 가졌고, <소년, 소녀를 만나다>, <커플>, <소녀상>, <그날의 피에타>, <알 수 없어요>, <불쌍히 여기소서> 등의 제목은 어떤 서사와 극적인 상황을 상상케 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인물의 형상에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화면 처리와 허구의 이야기가 결합된 구조를 통해 꿈속의 환상곡을 보는 듯하다. 이 글은 작가의 화면을 구성하는 세 개의 두드러지는 지점, 즉 공간, 형상, 얼룩으로 이동해 가면서 작업을 탐색하고자 한다.

    # 암흑의 공간
    그의 작품에서 암흑의 공간이 주는 인상은 적잖이 강렬하다. 틈을 허락하지 않는 암흑의 공간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고요하지만 곧 일렁일 것 같은 긴장의 공간이다. 이 암흑의 공간을 가늠해 보기로 했다. 깊이는 얼마나 될까. 얕은 표층일지, 아니면 더없이 깊은 심연일지. 이 공간의 온도는 몇 도일까. 따스한 온기가 있거나, 혹은 뜨거운 열기가 있는 공간일까, 아니면 시퍼렇게 차가운 곳일까. 그 공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밀도는 얼마나 될까.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기가 희박한 곳일까, 공기의 흐름이 허락되어 바람이라도 불 수 있는 공간일까. 깊은 바다 속처럼 액체로 채워진 밀도 높은 공간일까. 흐름 없이 정체되고 고여 있는 상태일까, 물의 흐름으로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까. 오감을 동원하여 이리저리 상상을 하고 가늠해 보지만 한 줌의 빛도 허락할 것 같지 않은 이 밤의 공간은 애초에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다.
    작가에게 이 가늠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은 왜 필요했을까. 작가의 작업에서 검은 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명진의 이전 작업을 감안했을 때, 화면 전체를 뒤덮는 검은 공간의 출현은 낯설다. 이즈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서 화면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작가의 언급은 탐색의 단초가 된다. 작가의 일상에서 그 변화의 계기를 유추해 보면, 2014년은 일시적으로 작가의 작업 환경이 바뀐 시기이자, 몇 가지 사건으로 기억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작가는 제주의 이중섭창작스튜디오에 거주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경기 남양주에 살던 작가로서는 환경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는 쉼표와 같은 여행의 시간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해에는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제주는 더없이 추운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스튜디오의 동료 작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뜻하지 않게 작가가 기대한 휴식의 시간은 애도의 시간이 되어버렸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마치고 전시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화면에 암흑의 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 시기의 사건들이 화면과 작업의 변화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와 그렇게 변화하는 생각과 태도를 작업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하려는 충동에 관여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다시, 작가에게 이 암흑의 공간은 왜 필요했을까. 하나의 대상이나 풍경으로 특정할 순 없지만, 작가는 어릴 적 고향 통영에서 본 바다의 인상이 저렇게 까맣고 그 위에 뭔가 반짝이고 아른거리는 풍경으로 남아있음을 회고한다. 한없이 까만 공간에서 빛이 나는 기억 속의 장면은 그해 제주 서귀포의 바다와도 비슷했다고 한다. 그리고 파도의 일렁임이 됐든, 떠밀려오는 온갖 쓰레기들이 됐든, 암흑의 바다 위에서 떠다니는 부유물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빛나고 있는 장면은 그에게 잔상으로 오래도록 지속된다. 하나의 작업이 나오기 까지 그 계기와 발생요인 및 수행과정에 관여하는 요소들의 작용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임에도 불구하고 암흑의 공간을 가늠하는 데 있어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난 현실의 사건들과 그에 관계하는 사유와 기억을 세심히 더듬어보게 되는 이유는 현실의 사건과 기억들이 유독 작업에 흡착되고 그것을 경유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미학적 성취와 관람자의 미적인 취향 및 판단을 위해 존재하기 이전에 예술가의 체험과 시선이 증폭되어 머무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관객의 지각작용으로는 암흑의 공간을 가늠할 수 없고 이것이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을 특정한 공간이나 대상으로 기술할 수 없다. 이 공간은 그저 작가가 자신의 기억과 마주하기 위해 작동하는 공간으로서 상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암흑의 공간은 무엇이냐가 아닌, 작가에게 왜 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이 유효하다.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곳에서 기억과 그 언저리를 마주하려는 충동이 강화되고 있는 작가에게 기억의 지층 및 현실의 표층을 건드리는 자극에 반응하기 위한 시공간으로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작가의 사변적 탐색으로 한정지으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살아있는 삶의 가치에 대한 창작자의 실체적인 체험으로서 예술을 성찰하고 이를 통해 예술작품에 흡착되어 도사리고 있는 작가와 관계하는‘현실적인 것’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현실적이지 않은 검은색’을 칠한다. 저렇게 까만색은 언제나 현실적이지 않다. 발생학적으로 작가의 일상과 기억이라는‘현실적인 것’과, 가늠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적 이미지가 주는 ‘비현실적인 것’의 이상한 결합은 그의 작품에서 주목되는 지점이다.

    # 형상
    칠흑같은 화면의 한 가운데에는 형상이 등장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은 검은 공간과 대비되어 빛을 흡수하고 보는 이의 시선을 주목시킨다. 작가의 예전 작업을 보면,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유기체적 곡선 이미지들이 화면을 채우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암흑의 공간과 함께 여러 인물과 사물의 형상이 등장한다. 말을 탄 신사와 숙녀, 그네를 타고 있는 소년과 소녀, 미녀와 야수를 떠올리게 하는 커플과 악사, 소녀의 얼굴, 교구장의 모습, 합창단의 모습, 나무를 옮기는 두 사람, 정원에서 물을 주는 소녀 등이다. 소년과 소녀 및 그 밖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위는 작가의 일상에서 일어났던 실제 사건이나 소소한 에피소드, 인상적인 순간, 옛 이야기들과 기억들, 상상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기억과 서사가 화면에서 형상으로 주조되고 동결된다. 우리는 이렇게 동결된 형상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읽을 수 있지만, 어쩌면 명료한 의미로 파악하거나 고정된 형태로 포착하는 데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우선 작가가 떠올린 사건과 서사는 화면에서 직접적이고 즉자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현실적인 것은 이성에 억압된 무의식의 자동기술이라는 측면보다는 형상의 느닷없는 등장과 그로 인한 기이하고 낯선 분위기의 출현을 뜻한다. 이를테면 나무를 이동하는 작가의 일상이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극의 한 장면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작가 주변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과 평범하고 하찮은 경험들은 작은 영감과 범속한 깨달음을 통과해 암흑의 공간 및 형상을 통해 비현실적인 것의 영역으로 도달한다. 현실의 기억과 서사를 되뇌려는 작가의 충동은 어째서 비현실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향하는 것일까. 오래전 자신의 저작 『행간(Stanze)』에서 서구의 예술이 비현실적인 것의 차원과 관계해 왔음을 탐색한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언급을 단편적으로나마 경유해 보면 어떨까.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시의 행간에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그에 의하면 이는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인간이 시도하는 공간이라 분석한다. 중세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했던 그의 분석이 현대의 텍스트 혹은 김명진의 작업에서 어떻게 유효할지 알 수 없으나, 비현실적인 것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려는 시도는 현실적인 것의 차원으로의 접근을 가능케 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논의만큼은 김명진의 작업에서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의 관계 및 모종의 체계를 다가가는 데 참고할 만한 것이다. 헌데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비현실적인 것의 차원에서 형상의 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앞서 언급한 아감벤은 행간의 매커니즘을 유령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 김명진의 작업에서도 형상이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형상의 모습이나 외형이 유령 같다는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고 접근하기 쉽지 않은 등장방식이 그러하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존재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형상은 작가가 닿으려고 하는 곳, 작가에게 작동되고 있는 무언가를 총체적으로 포획하거나 확약할 수 없는, 그저 하나의 기호 같은 것이다. 작가가 닿으려는 것이 이 형상 자체는 아니되, 형상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 같지만, 형상의 기호를 통해서만 화면에 나타날 수 있는, 이런 모호한 관계에서 유령의 어휘와 방식은 그의 형상이 지닌 속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해 보인다.

    # 얼룩
    이제 형상을 이루는 얼룩을 추적하려 한다. 얼룩은 작가의 독특한 형상과 화면효과를 만들어 내는 표현적 요소일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문맥에서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이 단절하고 소통하는 화면에서 또 다른 의미를 포함하는 요소일수도 있다. 작가는 형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흙을 빚듯이 형상을 빚는다고 말한다. 이 형상들을 빚는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만은 아니다. 한지에 탁본을 한 후, 작두로 자르거나 손으로 찢어서 그것을 작가가 원하는 형상대로 화면에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빚는다. 바위, 길바닥, 주변의 온갖 사물 등 요철이 있는 표면에 탁본을 하고 이 과정에서 한지에는 얼룩과 무늬가 생겨나고 결국 화면에는 얼룩진 형상이 주조된다. 탁본은 오랫동안 작가가 지속해 온 작업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탁본의 시작은 작가가 붓으로 그리지 않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시도한 것이다. 동양화 혹은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가 그 장르적 프레임과 동양화론의 관행적 해석 및 방법론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런 탁본의 방식은 작업의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와 효과를 지닐 수 있다.
    얼룩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의미와 그 감정은 작품 전체를 흔드는 울림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탁본을 통해 얼룩을 만드는 작업에는 자신의 예술적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 생겨난 미적 산물의 위치를 낮추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작가가 인지하는 얼룩은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을 대리할 뿐, 사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다. 얼룩은 모양이 일관되지 않아 사물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고, 형태와 윤곽이 비결정적이며 질서없이 무언가가 묻거나 스며든 자국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얼룩은 사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에 접근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얼룩은 사물을 온전히 대리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사물이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사물의 현장을 증명하는 사실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형태, 날씨와 기후, 온기와 습도, 물감의 점성, 작가가 가하는 압력의 세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사물의 상태와 속성,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또 다른 물리적 실재인 셈이다. 전능한 위치가 아닌 낮은 위치에서 사물의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는 것이 얼룩이다. 그의 화면 위에서 얼룩은 때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얼룩이 진정 빛나는 이유는 현실적인 것의 영역과 비현실적인 것의 영역이 상호 부상하는 화면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뭇 사물들의 물리적 연관성과 그 직접성이 도드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을 목도하는 현실의 언저리에서 등장한 암흑의 공간은 지루하고 보잘것없으면서도 매혹적인 일상의 기억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작가에게 작동되는 공간이며, 작가는 이 공간에서 하찮지만 빛나는 얼룩을 주조해 가면서 그 작동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시제목김명진: 축제展

    전시기간2020.09.07(월) - 2020.09.16(수)

    참여작가 김명진

    관람시간12:00pm - 06:00pm / 일요일_12:00pm - 05: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

    연락처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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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6 ~ 20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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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송 개인전

    한벽원미술관

    2020.09.09 ~ 20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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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림 개인전: 모순적 여행

    플레이스막

    2020.09.12 ~ 2020.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