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택 - 거꾸로, 비미술
2020.11.25 ▶ 2021.03.28
2020.11.25 ▶ 2021.03.28
전시 포스터
이승택
성장(오지탑) 1964/2020, 옹기, 360x50x50cm. 작가소장
이승택
바람 1970/2020, 천, 밧줄, 가변크기. 작가소장./미술관마당
이승택
기와 입은 대지 1988/2020, 기와, 골조, 각목, 합판, 흙, 300x1,850x250cm. 작가소장./전시마당
이승택
《이승택 - 거꾸로, 비미술》 전시 전경(6전시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승택
《이승택 - 거꾸로, 비미술》 전시 전경(7전시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 재료의 실험: 조각에 대한 질문
1960년대 이승택은 새로운 재료 실험과 파격적인 설치 방식을 통해 당시 미술 제도가 요구한 조각 개념에 도전하였다. 당시 조각의 재료로 인지되지 못했던 전통 옹기에서부터 산업화 신소재였던 유리와 비닐, 일상 오브제인 연탄과 양철, 각목, 시멘트 등을 새로운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재료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좌대 없이 바닥에 놓거나, 비정형의 오브제로 천장에 매달거나, 탑 형태로 한 줄로 쌓아 올리는 등의 자유로운 설치 방식을 통해 기성 조각의 문법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비조각을 향한 1960년대 재료 실험은 《신상회》(1962~1963), 《원형회》(1964), 《현대작가초대전》(1968), 《한국현대조각전》(1969), 《A.G전》(1970) 등 당시 새로운 경향의 전시회에 소개되었고, 1971년 국립공보관에서 개최된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기록 사진의 형태로 대거 전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전시자료 등을 바탕으로 1960년대 주요 작품들을 재제작해 작가의 초기 실험을 새롭게 조명한다.
2. 줄-묶기와 해체: 비조각을 향해
이승택의 작품에서 줄과 노끈을 이용한 ‘묶기’는 사물의 형태와 본성을 뒤집고 낯익은 일상을 전복시키기 위한 비조각을 향한 작가의 주요한 미적 방법론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50~80년대 주요 ‘묶기’ 작업을 대거 선보인다. 1958년 <역사와 시간>에서 오브제에 철조망을 묶는 작업과 함께 1960년대에는 노끈으로 비닐을 감거나 각목을 천으로 이어 묶었다. 1970년대에는 주로 돌, 도자기, 여성 토르소, 책, 지폐, 캔버스 등의 사물을 줄로 묶었으며, 한편으로는 캔버스 위에 노끈을 반복적으로 부착하여 움직임의 시각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묶기 작품들은 공간미술대상(1977), 동아미술상(1978) 등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나뭇가지에 천이나 종이를 감거나 매듭으로 이어진 줄과 막대를 실내공간을 따라 설치하면서 묶기의 행위를 사물에서 공간으로 확장하였다.
묶기의 어법은 고드렛돌이나 새끼줄에 무언가를 엮는 민속적 경험과도 연관되지만, 끈으로 묶은 가상의 흔적을 사물에 아로새겨 착시효과를 줌으로써 시각의 전환을 가져오거나 사물의 숨겨진 이면과 가상의 변형을 유추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역설법’이다. ‘매어진 돌’에서는 가상의 묶인 자국에 의해 돌의 속성이 딱딱함에서 물렁물렁한 것으로 변이하고, ‘매어진 여체’에서 묶음의 흔적은 수축과 팽창의 신체성을 극대화시킨다. 도자기, 책, 고서, 캔버스,
지폐를 묶는다는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문명, 담론, 지식, 예술제도,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적 저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작가는 캔버스 틀을 해체하여 그 위에 종이를 붙이거나 로프나 지폐 묶음을 풀어헤치는 등, 묶기의 과정을 ‘해체 행위’와 병치시키기도 하였다.
3. 형체 없는 작품
이승택은 1964년, 화판에 불을 붙여 한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그린 드로잉 <무제(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을 제작하며 ‘형체 없는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형체 없는 작품’이란 바람, 불, 연기 등 일종의 자연현상을 작품으로 끌어온 것으로, 뚜렷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시간에 의해 사라진다는 점에서 비정형성과 비물질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이는 조각의 문맥에서 끊임없이 탈주하고자 했던 이승택의 ‘비조각’ 개념의 핵심이다.
‘형체 없는 작품’은 1969년 야외에서 처음 설치된 <바람> 이후, 1970년 홍익대학교 빌딩 사이에 푸른색 천을 한 줄로 매달아 바람에 휘날리게 한 기념비적 작품 <바람>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구체화된다. 이후 1971년, <바람>은 제11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제2회 《A.G전》에 출품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1년 제2회 《A.G전-현실과 실현》에 선보인 <바람> 원작, 1980년대 <바람>(일명 종이나무) 원작을 포함하여 주요‘바람’작품을 대형 설치와 사진 작품 및 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바람’은 나뭇가지에 원색의 천이나 종이를 묶어 바람에 나부끼게 하거나 대형 천을 잡고 바람에 날리도록 하는 등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한 변주를 거듭해온 이승택의 대표작으로, 작가의 언급처럼 “비물질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노끈과 헝겊, 한지들을 등장시켜 “비시각적인 공기를 시각화”하고자 한 것이다.
비물질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무제(한강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c.1988)이나 《분신행위예술전》(1989)에서 처럼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물성을 지닌 작품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또한‘형체 없는 작품’은 <목구놀이>(1968) 등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제작하지 않고 기존 환경과 시설물에 개입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는 ‘사유(私有)의 장’ 연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4. 삶·사회·역사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고원에 태어나 한국 전쟁 중에 월남한 이승택은 1958년 한국 분단을 상징화한 <역사와 시간>을 발표한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예술가적 관심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보다 확장되는데, 이 시기 작가는 사회·역사·정치·환경·생태·종교와 성 등 다층적인 삶의 지평을 예술의 문맥으로 끌어온다. 동학운동이나 남북분단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 예술 제도와 문화 권력, 우상화된 종교, 금기시된 성 등은 작가에게 있어 성찰과 동시에 뒤집어 바라보아야 할 역설의 대상이었다. <동족상쟁>을 비롯하여 <권력가들의 최후만찬>, <결국, 예술은 쓰레기가 되었다> 등 1990년대 이후 주요 작품들에서 전위미술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이승택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이후 작가의 관심은 환경과 생태주의를 포괄하는데 ‘이끼 심는 예술가’와 ‘녹색 운동’ 연작, 한국·일본·중국·독일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수행한 ‘지구 행위’ 연작은 훼손된 자연을 치유하고 지구를 되살리고자 하는 생태 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5. 행위·과정·회화
이승택의 회화는 불을 태워 그 흔적을 작품으로 수용한 ‘그을음 회화’나 물을 흘러내리게 하여 그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물그림’처럼 작가의 행위와 과정, 생동감 있는 삶의 현장성을 중시하는 회화이다. 1989년 《분신행위예술전》과 1992년 카셀에서 진행된 《다른 것들과의 만남전》에서 그림을 현장 제작하고 불태워 그 흔적을 남긴 회화, 1995년 《정림건축 구사옥 해체 이벤트》에서 건물 벽면과 바닥에 깔아놓은 캔버스 천 위로 물감을 흘러내리게 하여 그 흔적을 드리운 물그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파도 이미지를 그린 후 산으로 들고 올라가는 수행적 과정을 통해야만 완성되는 <산정의 바다>는 바다를 산에 환치시키고자 하는
이승택만의 역설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6. 무속과 비조각의 만남
이승택은 1986년 후화랑에서 개인전《이승택 비조각전》을 개최한다. 이 전시회에서 작가는 붉은색과 푸른색, 검은색의 천들과 노끈으로 묶은 기둥 막대 등을 벽에 걸거나 바닥에 놓은 설치 작업을 주로 선보이며, 기이하면서도 섬뜩한 무속적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전시회 도록에 작가는‘무속과 비조각의 만남’이라는 글을 게재하는데, 작가에 따르면 작품에서 사용한 푸른색과 붉은색은 남과 여, 물과 불, 하늘과 땅의 음양 사상을 의미하며, 검은색과 붉은색은 옛 서민들의 이불에서 가난과 한(恨)이 배어있는 풍토색에서 인용한 것이고, 붉은 그림은 불길한 죽음이나 저승의 문턱을 은유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6년 당시 개인전을 원작을 중심으로 재연하여 삶의 한 부분으로 이어져 온 무속의 세계가 이승택의 작품세계 전반에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살핀다. 이승택은 일찍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생각으로 전통, 설화, 민속, 무속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켜왔고 한국의 민속품, 고드렛돌, 석탑, 옹기, 성황당, 항아리, 기와 등의 재래적인 모티브를 작업으로 끌어들여 비조각의 근원으로 삼았다. 1950년대 제작한 <설화>는 전통 장승을 소재로 한 것이며, 1960년대 제작한 오지 작품은 전통적인 항아리나 장독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1970년대 주요 작품인 <바람> 연작은 전통 풍습에서 오는 바다 풍어제의 울긋불긋한 깃발 형태나 성황당에 매달린 천 조각의 휘날림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승택 작업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무속의 에너지는 서구의 근대 조각 개념을 탈피하여 비조각의 세계, 작가가 ‘거꾸로’라고 명명한 이질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근원이었다.
7. 사진과 회화 사이
1960년대 이후 이승택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넘어 인화된 사진 위에 다른 사진을 콜라주하거나 페인팅을 가하면서 사진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1971년 첫 개인전 주요 전시작품이 사진이었던 만큼, 사진이라는 매체는 작가에게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배경 공간과 이미지를 합성하여 포토몽타주와 같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작품의 크기를 명확히 하거나 혹은 과장하기 위해 본인이 사진의 앵글 속으로 들어가 공간에 현장성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작가는 <폭포 그림>이나 <모래 위에 파도 그림>처럼 산이나 바다에서 퍼포먼스를 촬영한 후 프린트된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린 일명 사진-회화를 대거 제작한다. 이러한 사진은 작가가 구상한 미완의 프로젝트를 실현시켜주는 가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사진 위에 다른 이미지를 결합한 이승택의 사진은 두 개의 이질적 이미지의 충돌이 야기하는 낯선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로, 쌓아 놓은 나뭇더미를 촬영한 후 그 위에 색을 덧입힌 <예술가의 별장>은 평범한 일상의 장면을 개념적인 예술의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사진과 회화, 사실과 허구를 병치시킨 그의 독특한 사진 작업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되묻는 작가만의 ‘거꾸로 미학’을 함축하고 있다.
8. 야외 설치 작품
이승택은 조각적 행위를 미술관 내부가 아닌 대지로 옮겨 조각의 ‘확장된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야외에서 설치된‘바람’ 연작은 외부 자연의 변화와 상황을 예술의 문맥으로 끌어온 일종의 대지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 홍익대학교 빌딩 사이에 100여 미터 길이의 푸른색 천을 한 줄로 매달아 바람에 휘날리게 한 기념비적 작품 <바람>을 포함하여, 1970~80년대 주요 대지 미술 <바람> 3점과 1988년 야외 설치 작품 <기와 입은 대지> 등 총 4점의 야외 설치 작품을 전시마당, 미술관마당, 종친부마당에서 재연하였다.
* 참고자료: 이승택, <내 비조각(非彫刻)의 근원(根源)>, 1980
각목(角木)에 노끈이나 새끼줄로 둘둘 감는다. 흙은 붙이고 또 둘둘 감으며 시작한 내 업(業)이 어느새 감으며 묶는 것이 되어 버렸다. 아무 하잘 것 없는 이 줄 (개념)은 현대(現代)의 진통을 감으며, 묶으며 부질없는 탄생을 위해 맹세도 했지만 물체(物体)와 이미지는 늘 나를 배반하며 실망과 노여움만 키워 왔다. 그래도 견디는 길은 이 길 뿐이고 보면, 자괴(自壞)의 속성(俗性)에서 벗어나려는 이 작업은 진한 고통을 찾기 위해서 시대(時代)의 모든 절망을 다 묶고, 속고 속이며 매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물체(物体), 형태(形態), 색채(色彩), 기체(氣体) (냄새 포함), 공간(空間), 시간(時間), 단순화(單純化), 복잡성(複雜性), 중성화(中性化), 양식화(樣式化), 관계성(關係性), 비정형성(非定形性) 그리고 인간(人間)의 감각(感覺)과 논리(論理). 이러한 것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물음을 모두 묶어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지. 그것은 오히려 생명(生命)이 넘치는 싱싱한 것이 되리라.
현재는 과거로, 과거를 현재로 뒤바꾸며 작업(作業)한 나는 재학 시절부터 우리의 민속품(民俗品)에 매혹되어 진통을 겪어 왔지만 이것은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다. 지금도 옛 것을 재생하는 것에 불과한 짓이지만 각기 다른 과거를 골라서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는 것과 또 너무 고유성을 강조하면 오히려 빈곤을 자초 한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상식에 속하며, 참된 것은 미래보다 과거 속에서 찾아 나가면 첨단의 새 것이 되리라 믿어 왔다.
나의 초기작품은 오지 계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항아리, 장독에서 얻었으며, 바람작품(作品) 역시 시골의 성황당이나, 고목에 무당들이 새끼줄, 헝겊으로 매어놓은 것이나, 어민(漁民)들이 바다에서 배에 화려하게 장식한 풍어제(豊魚祭) 등에서 그 형태(形態)를 상태(狀態)로 바꾸어 무한의 공간에 펄럭이게 하여 비시각적인 공기를 시각화(視覚化)했고, 줄이며 헝겊, 한지(韓紙), 책, 백자(白磁), 지폐(紙幣), 돌멩이를 등장시켜 재래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비조각적(非彫刻的)인 개념에 나는 열을 올렸다. 근래의 암석(岩石)이나 돌멩이 작품(作品)도 옛조상들이 바리나 자리를 엮을 때 쓰는 고드래돌에서 얻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고 외래적(外來的)인「만레이」나「크리스토」의 것으로 오해해서 섭섭했다.
어쨌든 나의 줄 작업(作業)은 한매듭 한매듭 덩리의 응결을 위하여 묶고, 감으며, 풀어주며 애를 태울 것이며 이러한 도전은 금방 새로운 것을 토해낼 것 같은 기쁨과 슬픔이 엉켜있는 채찍에 쫓기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소리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려라, 그러면 미지(未知)의 세계가 열리고 아룸다움이란 그것을 버릴 때 완성된다고….
[이승택, ‘내 비조각의 근원’, 『공간』, 155, (5월 1980), pp.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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