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연신(Chu Yeon-Sin)

1986년02월01일 출생

서울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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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말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는 풍경과, 해가 떨어질 때의 풍경은 내가 오고 갔던 장소인데도

늘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10살 때의 하늘이 다르게 보이고 20살 때의 하늘이 달라 보이고

지금 보는 하늘이 또 다르게 보인다. 내가 스스로 자각하는 풍경을 비롯해 거울 속 모습도 바뀌어가고

의식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과연 지구상 우주를 통틀어서 불변하는 것이 있을까?


scramble Drawing

그것은 끝을 알 수 는 없는 행위로 늘 거닐던 길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에도 없던 선험적 경험들을 한곳에 모으는 수집과도 같은 행동이다.

진하지도 않은 펜을 잡고 무언가 뭉뚱그리듯이 몸을 맡긴다. 앞서 시행했던 드로잉들을 확장시키면서 내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에 다가서게 되었다.

실타래를 풀어나가듯이 쌓이는 선의 무게들에서 불분명했던 자아를 찾기도 하며 삶의 대한 응어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에 작업이 시작된다. 그것은 체내에 축적된 화학물질을 외부에 고착시킨 후 나를 숨기기 위한 또는 나를 지탱하기위한 구조를 만드는 유충의 생산적 노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한 서술, 시간과 관계없는 관찰자로서의 시각에서 얻은 짧고 깊은 단상을 통해 내적 필연성들의 집합을 만들고 그것으로 나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동시에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도 해석 될 수 있다.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합목적성을 두지 않고 미세한차이만으로 종이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선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표현을 극대화하기위한 이유도 있다. 도구에 따른 재료사용에 대해서는 규정과 규율이라는 것이 있으며 거기에서 나타나는 기법의 특징을 더욱 극대화하기에는 적정법이 있다. 그러나 적정법 이외의 성질의 반어적 자세로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느낌을 극대화하여 자연적 발생과정을 그림에 담는다.




물질이 최우선인 현대사회의 풍경과 망막에 맺혀져 인지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인 것에 실효성을 두고 있는 사회에서 나는 사라지는 것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

그것은 바닷가에서 건져 올린 유리 알갱이이거나, 내 눈앞을 불현 듯 스치고 갔던 먼지조각일 수 있다. 또한 막연하게 보았던 카페구석에 눌어붙어있던 껌 덩어리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서 나는 그 지긋지긋하게 뽑아낸 무수한 이미지들의 판에 박힌 공통적인 요인들에서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려내는 볼펜의 선들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것은 섣불리 결정하였다 해도 어제와 같은 수 없는 삶의 법칙과도 같은 논리이다.

이리 완성되건 저렇게 완성되건 한편에 고착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켜켜이 선들이 쌓인다. 단백질덩어리의 생명체(누에)에서 나오는 선, 혹은 시간과 거리의 차이에 따라 쌓이는 먼지입자처럼, 하얀 구름의 밀도가 들어차 검은 구름이 될 때 즈음이면 뇌리를 스치듯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자전적 스토리이다. 나의 일기와도 같은 것이며 그것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수천 장 생산된 디지털 이미지들이 비슷한 예술을 만들어내는 도식화되고 건설적이며 계산된 흐름의 현상들 속에서 그것은 반드시 라는 명분하에 생성되기 때문이 아닐까 물음한다. 그 결과 무지개는 보편적인 설명에 대해서만 해석되는 답을 갖고 있으나. 그 대상은 어떠한 것에서도 어울릴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보았을 때 내가 상징하는 작업 또한 불명확한 형상에 유추의 여백을 남겨 자율적 사고를 이끌어냄을 유도하게 된다.



고정된 이미지와 고정된 사상과 고정된 과학과 예술이 말하는 현상은 하루가 다르게

시간 분 초 단위로 바뀌고 진화하며 모습을 바꾸기 마련이다.

고요함도 언제고 라디오 소리에 사라져버리듯이 나는 내 그림을 통해 질문하고 싶다.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무엇이 보이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 해답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알 것이고 서로 다른 내가 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