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년 독일 크레펠트 출생 - 1986년 사망

독일에서 활동

학력

1947년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미국 전공 학사

경력

197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1962년 전위예술 단체인 플럭서스 활동
1961년 뒤셀도르프 국립미술대학 교수
1950년 나무조각과 불에 탄 재료로 작품 발표

추가정보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독일예술가인 요셉 보이스는 2차대전 중 독일 공군에 입대 비행사로 복무하다 소련군의 폭격을 맞고 러시아 크리미아 반도에 추락하여 죽을 뻔한 특이한 경험이 있다. 그때 그 지역 원주민 타타르인들은 죽음에 다다른 그를 살리기 위해 온몸에 버터를 발라주고 펠트지 담요로 몸을 싸 썰매에 실고 마을로 데려가 보이스를 회생시켰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작품에 펠트지, 왁스, 썰매, 약봉지, 동물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후 그는 예술과 삶의 분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의 진지한 사유와 적극적인 표현 방식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로 만들게 되었다. 요셉 보이스는 전쟁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1961년에는 모교의 조각과 교수가 된다. 이후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환경주의파에 가담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10여 년간 활발한 퍼포먼스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1960년대 말 ""사회적 조각""이라는 개념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조각의 개념을 정치 영역으로 확대하면서 1967년 독일 학생 정당을 조직하여 ""인간의 생활과 사고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근본적인 개선""을 주장하며 또한 ""진정한 대립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 예술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975년 제5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그는 ""보통선거를 위한 직접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정보 사무국""을 설치하며 사회정치적, 예술적 활동의 연장선을 보여준다. 1972년 대학 합격 정원 외의 학생들의 입학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여 교수직을 박탈당하였지만 1978년 카셀 연방 노동 법원에서 해직 무효 판정을 받기도 한다. 197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198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1,000그루의 나무심기를 시작하였던 보이스는 1986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특히 생전에 백남준과 절친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한데, 백남준과 같은 플럭서스 멤버이면서 사상과 철학이 통하는 동시대의 예술가인 그는 낮선 독일에 살던 한국인 백남준을 보살펴주며 동시에 함께 퍼포먼스를 가진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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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트 양복

    170x55cm,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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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rivoluzione siamo Noi

    190.3x100cm,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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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요테 III

    1984, 1채널 비디오, 1시간 1분 20초,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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