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환(Kim Du-Whan)

1913년11월08일 출생 - 1994년01월00일

서울에서 활동

작가 프로필 이미지

소개말

김두환의 회화적 삶

우리나라에 서양미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00년을 전후한 개화기이다. 전통의 서화(書畵)와는 전혀 다른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던 서양화법은 이후 정착기를 거치며 우리의 근대 화단을 형성하는 큰 역할을 하였고, 이제는 우리의 정서와 미감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조형기법은 일본과 구미 유학을 통해 그리고 그들에 의해 국내에서 서양화가들이 배출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서양화가를 지망하기에 이른다. 그가 다녔던 양정 고등보통학교 역시 “미술” 교습시간이 있었을 터이고 그를 통해 김두환 또한 서양의 미술을 접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졸업 후 그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김두환이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와 제국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한 것은 1930년대 중, 후반이다. 이때는 우리나라 서양화가 도입기를 거쳐 정착됨과 아울러 화가의 증가와 조형언어의 다양화를 통해 그 폭과 깊이를 확장함으로써 본격적인 전개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즉 일본풍(外光派)류를 벗어나 인상주의를 자기화하고, 한편으로는 인상주의 이후 생겨난 다양한 유파의 조형방식을 수용하는 등 서양회화에 대해 이전보도 인식 면에서나 조형적으로나 확장된 태도와 여건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김두환은 유학시절 일본식 외광파 그림은 물론, 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보수화된 화단에 반하여 추구했던 새롭고 실험적인 조형형식을 보고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유학시절 이과전(二科展)과 독립 전(獨立展)에 출품했던 것 또한 그 근거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이과전은 이미 1914년에 새로운 미술을 표방하며 결성된 이과회(二科會)의 그룹전이며, 독립 전은 1930년대 들어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주장하며 생겨난 미술단체들의 하나인 독립미술협회의 그룹전이다.
귀국 후 그는 고향 예산에 김두환 회화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새로운 서양화법의 화가들이 다수 활동했던 서울이나 평양, 대구 등지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 곳에 “회화연구소”라는 이름이 거린 자신의 작업실을 연 것은 매우 드물고도 의미 있는 일로서, 예산의 근현대 미술에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이 무렵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으로 열고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여 1940년부터 1942년까지 3년 연속 입선한 것 또한 그에게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큰 신념과 자신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불교를 소재로 삼은 작품은, 예산에 유서 깊은 사찰인 수덕사가 있고 또한 그의 종교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작가의 회화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할 것이다. 예산이라는 공간과 수덕사는 이응노와 나혜석과도 인연이 깊은 곳으로, 실제로 유족과 주변인들은 그 세 사람 사이의 교분과 작품 제작 등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바, 김두환이라는 화가 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깊이 밝히는데 있어서도 이에 대한 연구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자화상이라 할 1948년 작 <자화상>의 배경에는 예산의 회화연구소에 직접 그린 벽화가 묘사되어 있는데, 한복을 입은 소년의 모습 뒤로 당풍(唐風)의 복식을 한 여인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화가 김두환의 작품세계는 아직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여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과 족적은 그것을 보는 이들은 물론 연구자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