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 요하네스 피터 오우트(Jacobus Johannes Pieter Oud)

1890년02월09일 네덜란드 퓌르머렌트 출생 - 1963년04월05일

학력

델프트 공과대학 건축 전공 학사
암스테르담 건축 전공 학사

추가정보

암스테르담과 델프트공과대학에서 교육받은 뒤 레이덴과 뮌헨에서 많은 건축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근대건축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1916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를 만나 당시 큰 영향을 미친 잡지 〈데 스테일 De Stijl〉을 공동창간했다(1917). 이 잡지는 전위 예술가들의 모임인 '데 스테일파' 이론을 전개했고, 오우트는 곧 근대건축에서 데 스테일 양식의 주요주창자가 되었다.
순수하면서도 고도로 기하학적인 양식을 보인 초기 작품 중에는 셰베닝겐의 주택(1917)과 퓌르메렌트의 공장(1919)을 위한 실현되지 않은 계획안이 있다. 그는 노르드웨이케르호우트의 호텔(1917)과 카트웨이크의 알레혼다 빌라(1917)를 설계했다. 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건물은 수평선과 수직선이 미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곧게 뻗은 긴 벽면이 부드럽게 둥글린 모퉁이로 말려 들어가고 각각의 건물은 널찍한 공간을 에워싸고 있으며, 단순화된 직선과 원형 형태가 비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미묘하게 균형잡힌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다. 1918년 오우트는 로테르담 시의 주택담당 건축가로 임명되어 노동자들을 위한 집단주거를 공급하는 시급한 과제를 맡았다.

스팡헨(1918)·투셴데이켄(1920)·후크반홀란트(1924~27) 등지에 지은 주택 단지는 단순하며 기능적인 엄격함을 지닌다. 이는 미카엘 데 클레르크가 이끄는 암스테르담 학파의 특징인 상세부의 회화적 정교함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로테르담에 카페 데 위니(1924~27, 1940 파괴)와 키프후크 주택단지(1925~27)를 설계할 무렵에는 데 스테일 운동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이 두 작품에서는 여전히 데 스테일의 원칙을 강조했다. 저서 〈네덜란드 건축 Höllandische Architektur〉(1926)은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후기 작품 가운데 기념비적이고 약간은 장식적인 헤이그의 셸 빌딩(1938)은 일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건물에는 그가 데 스테일 이론을 저버렸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른헴 근처에 지은 어린이 재활원(1952~60)은 국제주의 양식의 특징인 우아한 기하학적 구성을 끊임없이 완성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