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말
김종학(b.1937)은 이십 년 넘게 설악산에서 살고 있다.
이십 년간 설악산에서 살아온 김종학의 화면에는 설악의 풍경이 이십 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설악에 사니까 설악의 풍경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를 두고 ‘설악의 화가’라는 애칭을 부여하기도 한다. 산을 주로 그린다 해서 ‘산의 화가’니, 바다를 많이 그린다고 해서 ‘바다의 화가’니 하는 애칭이 있다.
그런데 김종학을 두고 설악의 화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앞의 경우와는 다르다. 어느 특정한 대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과는 분명히 차원을 달리한다. 그는 대상으로서 설악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설악을 통해 자기 속에서 내재화된 설악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설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설악에 사는 한 예술가의 내면풍경이랄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화면에는 일정한 거리로서의 원근이 없다.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앞에 있는 것이나 뒤에 있는 것이나 일정 간격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 평면이라는 단면 속에 나란히 놓인다.
앞에 있는 것이나 뒤에 있는 것이 간격의 질서를 넘어 서로 뒤얽혀 놓인다. 모든 설악의 대상은 똑 같은 위치에서 작가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표현하지 않고 표현 속에 자적(自適)하는 그의 화면은 그런 만큼 질료의 생생함과 행위의 자재(自在)로움이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유화 안료의 진득진득한 맛이, 때로는 미끌미끌하게 이어지는 터치와 때로는 텁텁하게 짓이기는 터치를 통해 선명하게 구현된다.
회화가 실종되었다고 아우성치는 시대에 그의 작품은 아직도 회화가 어딘가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앞에서 안도의 숨을 쉬는 것도 아직도 회화가 살아 있구나 하는 반가운 해후에서일 것이다. - 미술평론가 오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