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람(Lee Bo-Ram)

1980 출생

서울에서 활동

작가 프로필 이미지

소개말

나는 전쟁과 테러 희생자들을 담은 보도사진들을 그린다. 그들의 울부짖는 얼굴과 상처 입은 신체, 흘러내리는 피를 그린다. 내가 이런 사진들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였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뉴스에서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의 수많은 게시판들에 계속해서 전쟁보도사진들이 올라왔었다. 하나의 제목 아래 수많은 희생자들이나 불타는 도시들과 같은 사진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클릭이라는 단순한 동작으로 방에서 편하게 그들의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러한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가장 고통스럽고 사적일 수 있는 얼굴들을 마치 풍경사진을 보듯,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단지 약간의 죄책감만을 느끼면서-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었다. 사실 나의 작업에서 이러한 사진들과 관련된 주된 관심사는 그 장면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이 주는 감정적인 문제들에 연결되어 있다. 나와는 피부색도 생김새도 옷차림도 전혀 다른 타인들의 고통스러운 장면들은 나에게 ‘여기에 있다’는 안도감을 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고통을 마치 감상하듯 먼 ‘이곳’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죄책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은 이전에 담고 있던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가 완전히 대체해버리는 미디어의 환경 때문에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감정적인 경험을 감정의 소비, 죄책감의 소비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방식이라고. 분홍색은 ‘사랑’을 상징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가장 상업적인 색이기도 하다. 감정이 담겨있는 듯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은 텅 비어있는. 이 색은 현대인이 가지는 가벼운 죄의식과도 닮아있다.
최근의 <희생자> 작업들에서 나는 보도사진의 희생자들을 아이보리의 성상들처럼 그린다. 그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희생자들을 포착한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방식이 박제화 된 성상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다양하고 개별적인 상황에 놓인 희생자들은 그들이 흘리고 있는 붉은 피 때문에 ‘희생자’, ‘고통’, ‘슬픔’ 과 같이 단순화되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버리고 그러한 감정들을 상징하는 은유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애초에 그들을 그러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온갖 정치, 경제, 종교적인 원인들은 잊혀 버린다.

나의 그림들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그려진다. 일단 이 눈은 표면적으로 나의 내면 심리를 관찰하는 눈이다. 그렇지만 어떤 면으로는 희생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찰하는 눈이 있음으로 해서 화면 속의 다른 이미지들이 더욱 부각된다. 나의 작업의 시작점은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뉴스 속 이미지들을 볼 때, 인터넷 게시판의 사진들을 보기 위해 클릭하고 마우스를 내릴 때, 과연 본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의 작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단지 한 가지 전제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바라본다는 것)에 대해 전혀 궁금해 하지 않으면서, 혹은 의심하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오히려 폭력적이다.

<희생자> 작업들은 나의 자화상이다. 거기서 나를 대체하는 이미지는 피와 같은 붉은 색을 묻히고 있는 붓들이다. 희생자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세워져 있는 붓들은 나인 동시에 나의 행위와 시선을 대변한다. 붓털의 붉은 색들로 인해 마치 그것들이 희생자들을 찔러 피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나의 작은 불편함, 작고 가볍고 사라지기 쉬운 죄책감이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붙들어 놓았을 뿐이다. 나의 작업은 전쟁이나 테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것이다.
작가노트 中